성경의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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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싸움, 전쟁 

히브리서 12:1-3을 읽어보자.

히브리서 12:1-3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는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이 구절에서는 우리에게 믿음의 주요 온전하시게 하신 이인 예수님을 보면서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라고 한다.이 구절은 우리 기독교인의 길과 삶을 다음과 같이 달려야 할 경주에 비유한다.

1. 인내로써

2. 믿음의 주요 온전하시게 하닌 이인 예수님을 보면서.

다른 구절인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다시 경주에 관해 언급한다. 다음을 읽어보자.

빌립보서 3:12-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바울은 이미 상을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고 있었다. 목표는 상 받는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 상을 이미 받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인생의 목표를 이 상을 받는데 집중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달려간다는 목표가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24-27에서 경주와 상에 대해 다시 이야기한다. 해당 구절을 읽어보자.

고린도전서 9:24-27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을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바울은 썩지 아니할 승리자의 관을 목표로 달음질 하고 있었다. 그의 인생은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는 주님 속으로 주시는 썩지 아니할 관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이 목표에 다른 것이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불확실성으로 달리지 않았다. 그는 목표를 알고 있었고 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확신했다. 바울은 자신을 경주에서 이기기 위한 목표가 있는 선수로 비유하면서, 몸을 쳐 복종하여 자신이 남에게 전파한 후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했다. 바울이 달리고 있는 경주는 바울을 위한 경주가 아니었다. 우리도 같은 경주를 하고 있다. 같은 승리자의 관, 같은 상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

더 나아가, 우리가 달리는 이 경주는 고리도전서에 나오는 싸움과도 같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이 이야기를 하였다. 이모데 전서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는 이야기를 읽어보자.

디모데전서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싸워야 할 선한 싸움, 믿음의 선한 싸움으로 비유한다.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바울은 마음 상태에 관해 궁금해한다.

갈라디아서 5:7-10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그들은 잘 달리고 있었지만, 더는 그렇지 못하다. 누군가 그들을 막아 흔들리게 했다. 이 경주에는 우리가 잘 달리기를 원치 않고 가능하면 아예 달리지 않기를 원하는 경쟁자가 있는 것 같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2:3-5에서 다시 경주와 싸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디모데후서 2:3-5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경주는 싸움이 되고 싸움은 전쟁이 된다. 선수는 군인이 되고 군인은 전사가 된다. 그리고 선한 군인은 고난을 참는 법을 배워야 한다.

위 내용을 요약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경주의 선한 선수와 선한 군인을 그릴 수 있다.

즉, 선한 군인과 선수는 다음과 같다.

i) 인내심을 가지고 달린다. 반즈는 자신의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기에서 ”인내”라는 단어는 불굴의 인내를 의미한다. 장애물에 걸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기절하지 않고 경주를 해야 한다. 우리보다 앞서 같은 경주를 한 많은 사람들이 참았던 것처럼, 그리고 끝까지 갔던 것처럼 우리는 인내해야 한다.”

ii) 선한 군인과 선수는 목표가 있고 인생의 목표가 가능한 편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받는 것이다.

iii) 선한 군인과 선수는 불확실성으로 달리지 않는다. 그들은 허공을 치지 않는다. 눈앞에 목표, 상, 썩지 않을 관이 있다. 반즈는 다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불확실성이 없이(ουκ αδήλως ouk adelos)”. 이 말은 신약에만 나온다. 클래식 작가들은 대개 “모호하게”라는 의미로 썼다. 여기에서 의미는 목표를 알지 못하고 달리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나는 무턱대고 달리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분투하지 않는다. 나는 목표를 알고 눈을 그 목표에 고정시킨다. 나는 눈에 보이는 목표와 관이 있다.”

iv) 선한 군인과 선수는 자신을 단련하고 어떻게 하면 자격을 상실하는지 잘 알고 있다. 자격 상실의 위험은 바울이 쓴 고린도후서에 나온다.

고린도후서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선한 선수는 자신을 점검하고, 자신의 믿음을 확인한다. 그는 자신을 시험하고 자신을 확증한다.

iv) 더 나아가, 선한 군인은 자신을 이 인생의 일들에 얽매이게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택한 그분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이렇게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군인이면서 우리 자신의 일에서 모든 이익을 추구할 수 없다. 군인으로서 부름을 받으면, 일, 농장, 가게를 두고 전쟁터로 간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군인이라 직업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바울 자신은 생계를 위해 막사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 일에 “얽히거나” 매이면 안된다. “매튜 헨리의 성경 전서에 관한 해설”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군인에게 중요한 것은 그의 장군을 기쁘게 하는 것이고 기독교인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기쁘게 하고 그분께 우리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를 군인으로 택하신 그분을 기쁘게 하는 방법은 이 인생의 일에 얽매이지 않고 성전에서 우리를 가로막는 장애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즉, 살아가기 위한 일이나 의무로 직업은 있어야겠다. 그러나 거기에 얽매이고, 억눌리면 안된다. 이것은 우리 목표가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군인이 되어 우리 장군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쟁에 나와 있고 전쟁터가 아닌 곳에 정착하면 안된다!

더 나아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씨 뿌리는 비유, 이 세상에 얽매임, 부자의 기만, 인생의 즐거움에 관해 하신 말씀의 내용은 하나님 말씀이 결실을 맺을 수 없게 한다. 이 비유에서 많은 사람들이 시작은 잘 한다. 하나님 말씀의 씨를 마음에 뿌리면 싹이 났다. 그러나 열매를 맺는 것은 마지막 경우 뿐이다. 이 비유는 열매를 맺는 사람의 수와 처음 시작한 사람의 수가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 비유에 관한 주님의 해석을 살펴보자.

누가복음 8:11-15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기는 것이요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두 번째와 세 번째 경우는 시작은 좋지만, 잘 끝내지 못한다. 경주를 시작하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경주를 시작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계속 달리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 달리려면 인내심을 가지고 우리 믿음의 주인이시자 경주를 끝내신 분인 예수님을 바라보고 전쟁에서 싸우고 장군을 기쁘게 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인생의 일에 얽매이면 안된다. 기독교인이 되면 삶이 쉽고 즐거워진다는 오해는 버려야 한다. “축복”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하도록 허락받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쉬운 인생이 목표가 되고 있다. 우리의 목표가 되지 않을 것들에 집중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 목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 얽매이고 집중하는 것들은 우리 마음에 뿌려진 씨가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한다.

이 삶에서 우리의 목표는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이라는 정의를 충족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과 베드로와 다른 사람들은 오늘날에 살았으면 사회에서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가지고 있던 이 세상의 특권을 버렸다. 빌립보서 3:4-11을 읽어보자.

빌립보서 3:4-11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은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사회적으로 존경받던 사람이었다. 그는 이 세상의 사회적 정의에 의하면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얻은 후, 이 모든 것을 배설물이라고 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는 유혹을 참고 부와 권력에 대한 믿음을 포기해야 한다. 이웃보다 조금 부유하거나 조금 낫거나 이런 저런 어려움을 피하거나 더 많은 “축복”을 받기 위해 기독교인이 되면, 우리는 뭔가 잘못 이해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5:19의 바울의 말을 읽어보자.

고린도전서 15:19
“…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우리가 이 인생을 위해 주님을 믿거나, 믿음의 목표가 이 인생이라면, 우리는 아주 불쌍한 사람들이다. 이 인생에서 목표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부르는 그분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 장군이고 우리 믿음의 주인이시자 경주를 끝내신 분이시므로, 우리는 눈을 그분께 고정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달려야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가지는” 삶을 약속하지 않으셨다.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다(마가복음 8:34). 그분께서는 축복을 약속하시지만, 고난에 관해서도 말씀하신다. 상이 있지만, 경주이다. 승리자의 관이 있지만, 싸움이다. 그리고 인내심과 집중력을 요한다. 언덕을 맨 위까지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오는 것이 쉽다. 뛰어내려가는데 목표지향은 별로 필요하지 않지만, 그저 다리가 이끄는 대로 가면 된다. 그러나 올라갈 때는 인내심이 필요하고 목표에 집중해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지치면서 경주를 포기하고 앉아 인생을 허비하게 된다. 씨 뿌리는 비유의 세 가지 경우에서 시작은 좋지만, 마지막 경우만 언덕을 뛰어올라가는 것을 택한다. 그들은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다…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자니라(누가복음 8:15).” 그들은 말씀을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듣고 인내로 결실했다. 여러분의 목표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높으신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달려간다는 목표를 세우라.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군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라. 여러분은 시험을 받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았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인생을 그분께 집중하라.

경주와 경쟁

전에 보았듯이, 기독교인의 삶은 전쟁과 같다. 그리고 갈라디아서에서 읽은 것처럼, 그들은 잘 달리다가 누군가에게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유혹과 부자의 기만, 이 세상에 대한 관심, 인생의 즐거움은, 우리를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열매 맺지 못한 두 번째와 세 번째 경우가 되게 만든다. 우리는 같은 비유에서 악마가 와서 하나님 말씀을 빼앗아가서 결국 잃어버리는 첫 번째 경우도 볼 수 있다. 경주는 그냥 달리기만 하는 경주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이 경주에는 분명 경쟁자가 있다. 우리가 성공적으로 경주를 마치는 것을 원치 않는 누군가가 있다. 그는 우리 목표를 방해하고 목표 달성을 중단시키고 싶어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우리의 적이다!

에베소서 6장 말씀에서 이 적과의 싸움에 대해 읽어보자.

에베소서 6:10-12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이 구절은 그 다음 내용과 함께 우리와 적의 싸움에 관해 설명한다. 바울은 싸움에 관한 설명을 바로 시작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과 그분의 능력 안에서 강해지도록 제안한다. 여호와 같은 분은 없다. 적을 물리칠 수 있게 하는 건 우리의 힘이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전능하신 힘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강해져야 한다. 계속해서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한다. 전사는 갑옷을 입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군인인 우리도 갑옷을 입어야 한다. 이 갑옷의 목적은 우리가 마귀의 간계를 대적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적은 마귀이며 그는 간계가 있다. 이 구절은 우리가 대적할 것이 누구인지 말해준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대적해야 할 상대가 있고 싸워야할 싸움이 있고 입어야 할 갑옷이 있다.

14-18절은 이 갑옷에 관해 이야기한다.

에베소서 6:13-18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갑옷을 주셨고 우리는 적과 싸우기 위해 이 곳을 입어야 한다. 다음은 경주에서 우리의 경쟁자에 관한 설명이다. 베드로전서 5:8-11을 읽어보자.

베드로전서 5:8-11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마귀는 우리의 상대이자 적이다. 그는 두루 다니며 우리를 삼키려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근신하고 깨어 있으라고 하신다. 매튜 헨리의 성경의 해석은 이 두 단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다음은 그들(기독교인)의 의무이다. 1. 근신하면서 금주, 겸손, 금욕의 규칙으로 안팎으로 무장하라. 2. 불안정과 부주의로부터 깨어있으면서 눈앞의 위험이 영적인 적으로부터 온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이해하고 그 의도를 막고 영혼을 구하는 데 주의하고 열심을 다하라.”

우리는 올바른 목적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우리는 근신하고 깨어 있으면서 중심을 마귀가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두어야 한다. 우리는 그분께 집중하고 그분을 바라보는 경주를 해야 하고, 적으로부터 근신하고 깨어있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한동안 고통 받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구절은 그 증거가 되고, 디모데의 예에서도 기독교인의 삶에 많은 고통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싸움이 있고 굳건해야 한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면서 고통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이런 이유들이 우리 기독교인의 삶에서 용기를 잃게 하고 고통받게 하고 하나님께서 여기 안 계시다고 느끼는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싸움 중이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함께 계시다. 베드로는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베드로전서 4:16)”고 말했다. 그리고 야고보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야고보서 1:12)”라고 말했다. 오늘 나는 여러분에게 유혹을 참는 용기가 생기기를 바란다. 이것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장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는 감정이 상할 수도 있고 질문이 생길 수도 있고 왜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허락하셨을까 의아할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런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 그분께 질문을 하고 우리 감정을 말씀드려야 한다. 우리 마음이 다치고 실망스러운데 그 감정을 그대로 두고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욥은 바르게 살던 사람이지만 갑자기 그의 앞에 시련이 왔다. 그의 건강이 악화되고, 자녀가 죽고 재산을 모두 잃고 그 상태에서 믿음을 가지는 그를 아내가 나무란 것이다. 게다가 친구들이 그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그를 비난했다. 누가 이런 최악의 상황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욥은 죽고 싶었다. 내가 욥이었어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그는 강해지거나 아내 말처럼 하나님을 욕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 마음을 열고 질문을 했다. 그의 이야기에는 하나님께 묻는 왜라는 질문으로 가득하다. 그는 많은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많은 왜라는 질문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기대했을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이루어지지 않은 소망만큼 힘든 일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소망을 이루어주실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으셨다. 일자리가 없고 배우자는 돌아오지 않고 건강은 회복되지 않고… 모두 이루어지지 않은 소망들이다. 무엇이든 간에 이것은 시험이다. 무슨 일이든 간에 우리는 마음을 닫아서는 안된다. 무슨 일이든, 주님께 이야기해야 한다. 그분께 묻고 소리내어 이야기하고 대화해야 한다. 이 모든 고통을 당한 욥은 아내 말처럼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기 13:15)”. 이 끔찍한 고통과, 하나님과의 논쟁 가운데에서, 욥은 믿음을 잃지 않았다. 욥이 했던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분을 거부하지 않고 질문해야 한다. 욥은 고통스러웠지만 그 시험을 참아냈다. 본래 믿음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의 아내는 고통을 참지 못했다. 그녀는 좋은 시절에는 하나님에 대한 희망이 있지만, 고통스러울 때는 배반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두 번째 예에 해당한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화도 받지 아니하겠냐고 말했다(욥기 2:10). 욥은 준비되어 있었고 우리도 그래야 한다. 우리도 어떤 일을 겪어도, 어떤 고난이 와도, 어떤 좌절이 있어도, 끝까지 믿음을 유지하기로 결심해야 한다. 이것은 어떤 생각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우리 앞에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어떤 일이 생겨도 경주를 끝까지 하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달려가야 한다! 바울의 말처럼 말이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타소스 키울라초글루 (Tassos Kioulachogl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