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선택받은 자: 운명예정설을 살펴보자
운명예정설과 자유의지에 관련한 의문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어왔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는구원받을 자들을 이미 선정해 놓으셨으며, 그 외에는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결론부터 짚고 넘어 가자면, 한 사람의 구원 여부는 다른 누군가에게서 복음을 듣고 이를 믿고 받아드림으로써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복음을 듣고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지만, 운명예정설에 따르자면, 이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미리 "선택"하시어 구원의 "운명을 미리 정해두셨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일인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운명을 미리 정해두지 않으셨다면 혹은 그를 선택하지 않으셨다면(선택받지 않은 자들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그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란 의미가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누가 구원받고 구원받지 못할 것인가는 하나님께서 미리 선택하시고 이미 정해 놓으신 "예정된 운명"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은 구원을 받고, 선택 받지 못한 자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엄하게 말하자면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박탈당한 자들이다). 운명예정론 안에서는 구원에 관한 모든 책임이 하나님께 미루어지므로 인간들에게 참으로 편리한 교리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들을 미리 선정해 놓으셨으므로 만약 당신이 다른 이들에게로 복음을 전하고 싶지 않다 하더라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런 성향을 미리 아시고, 구원 받기로 선택된 자는 당신에게로 떠밀지 않으실 것이다. 어떻게 되든 구원을 받아야 할 자는 구원을 받을 것 아닌가?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있으니 말이다. 이 편리하기 그지없는 교리에 대한 저자의 개인적인 의견은 이렇다. 운명예정론은 참으로 잘못되고 위험한 교리이다. 또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데 있어 소극적인 경향을 띄는 것도 운명예정론의 탓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말이다. 이 교리에 따르면, 궁극적으로 구원받을 운명을 타고난 이들은 어떻게든 구원을 받기 때문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믿는 자로서의 책임감을 잘 느끼지 못하게 된다. 나는 이러한 교리에 매우 반대하는 바이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 그리스도를 “모든” 인간들을 위해 내어주셨으며,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이들을 구원하고자 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일부의 사람들만 선택하시어 구원하시고자 한다는 의견은 잘못 되었음을 의미하게 된다.
구원: 모든 이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택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열망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디모데전서 2장 4절을 살펴보도록 하자.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누가 구원 받기를 바라시는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바라시고 원하시는 바는 무엇인가? 위의 구절에 나타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들이 구원 받기를 바라신다."모든 사람"은 이 세상 모든 이들을 뜻한다. 일부 사람들만을 선택하시고 오직 그들만을 위해 예수님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리 하셨으며 그들 모두가 구원 받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뜻이요, 바람이며, 그 분의 선택인 것이다. 아래의 디모데전서 2장 5-6절의 말씀은 이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디모데전서 2:5-6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과연 단 몇 명의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셨나? 그 분의 희생은 일부의 몇 명이 아닌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맛볼 수 있도록 십자가에서 우리 모두를 위한 대가를 치르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일부의 사람들만 선택하시고 나머지는 거부하셨다는 주장은 예수님의 희생을 완전한 모순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당신이 모든 죄수들을 사랑하여 그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최대, 최고의 대가를 지불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당신은 이 중 몇 명만이 석방되기를 바라겠는가? 그들 모두일 것이다. 만약 그들 중 몇 명이 감옥에 남겠다고 한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는가? 노엽고 슬프지 않겠는가? 모두를 석방시키기 위해 최고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마음도 이와 같을 것이다. 당신의 외동 아들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를 통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최대, 최고의 대가를 지불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당신께서 가능하게 하신 이 크나큰 은혜를 경험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시길" 바라신다 (골로새서 1:13).
다음은 이미 잘 알려지고 자주 인용되고 있는 말씀, 요한복음 3장 16-18절이다.
요한복음 3:16-1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위 죄수들의 예와 같이 일부가 아닌 모든 사람을 뜻한다) 사랑하시어, 모든 이들을 위해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셨다. 왜 그리하셨는가?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다.” 하나님께서 외아들을 세상에 주셨을 때는 세상의 일부만을 겨냥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 전체를 마음에 두고 계셨던 것이다. 일부의 죄수들만이 아닌 모든 죄수들을 석방시키고자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며, 이에 걸맞은 대가 또한 치르셨다. 이 지구상의 그 누구도 하나님께 버림받을 운명을 타고난 자는 없는 것이다.
사도행전 10:43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로마서 9:33, 10:11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요한일서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요한복음 11:26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요한복음 3:16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2:46-48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찌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위의 구절은 믿는 자 “모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누구든 상관없이 구원의 여부는 그가 믿는지 믿지 않는지에 달려있다고 쓰여있다.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바람에 따라 복음을 믿기로 택하는 자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기를 택하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여기서 말하는 선택이란, 하나님의 선택이 아닌 인간의 선택을 뜻한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선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한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을 선택하는 것. 운명예정론이 바로 이 종류의 선택에 기초한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이 아닌 우리를(그리스도인들) 선택하시고, 구원받을 자의 운명을 미리 예정해 두셨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스도인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선택 받지 못하였다는 뜻과 마찬가지다. 과연 이것이 올바른 교리일까? 그렇지 않다. 위에서 제시한 다른 성경 구절들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바램이자 선택은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1장 3-7절이 이야기하는 예정된 운명이란 -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른 이들과 차별하여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원 받기를 선택하셨음을 뜻한다. 이 선택은 인류의 일부만으로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적용된다. 아까 죄수들의 예로 돌아가보자. 모든 죄수들이 다 자유를 맛볼 수 있는 선택을 받았다. 그렇다면, 나는 이 경우에 풀려난 죄수들에게 “당신에게는 자유의 선택이 주어졌다”, “내가 지금 당신의 운명을 이미 정해 놓았었다” 혹은 “당신은 내게 선택받은 자이다”라고 말 할 자격이 있는가? 당연하다. 그렇지만 내가 이 가상의 시나리오에서 이야기하는 “선택”이란 특정한 죄수들을 나머지 죄수들(석방을 거부했던)과 차별하여 우선적으로 선택했다는 뜻이 절대로 아니다. 석방되기를 거부한 죄수들도 또한 마찬가지로 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인 것이다. 그렇듯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선택하신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결코 다른 이들과 차별하여 선발하신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것 저것 따져가며 구원받을 자들을 차별적으로 선발하시지 않는다.
사도행전 10:34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대신 하나님을 구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구하는 자들을 찾고 계신다.
시편 14: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신명기 4:29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
누구든 하나님을 구하고 초대하면,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분명히, 그에게 모습을 드러내시고 그를 가까이로 이끌어 주신다. 이는 특정한 이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구하는 자라면 누구든지에게나 허락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온맘 다해 당신을 구하는 이들을 찾고 계시며, 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정해진 법이다. 누구든 진심으로 하나님을 자신의 맘속으로 초대한다면, 하나님께서는 100% 확실히 자신을 보여주시고 그를 자신에게로 이끄실 것이다. 요한복음 또한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요한복음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많은 이들이 이 성경 구절을 읽고 “보라,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 달려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들을 가까이 이끄시고, 원하지 않는 자들은 이끌지 아니 하신다”라고 이야기 하곤 한다. 그런 식으로 이 구절을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차별대우 하신다고 간주하고,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돌아가신 사실을 무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자신에게로 이끄실지에 대하여 차별하시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영적인 법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구원: 하나님의 책임과 우리들의 책임
실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구원을 위해 착수해야 할 매우 중요한 역할을 주셨다. 구원에 관한 한 하나님께도, 또한 우리에게도 주어진 역할이 있다. 고린도후서 5장 18-21절은 우리에게 주어진 “화목하게 하는 직분”에 대해 분명히 이야기 한다.
고린도후서 5:18-21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자신의 외동아들을 세상에 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화해를 하셨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길이 열려 있다는 뜻이다. 다시 죄수들의 예를 빌리자면, 모든 감옥의 문은 열려 있었다. 하지만 몇몇 죄수들은 눈이 멀어 그걸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이 시대의 신, 곧 악마로 인해 눈이 멀어(고린도후서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자신들의 눈 앞에 펼쳐진 구원의 길을 보지 못한 것이다. 이와 같이, 구원의 길을 차마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누군가가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문이 열렸다! 하나님과 화목을 되찾으라. 그분께서는 죄를 모르는 분께 우리의 죄를 넘겨주시어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라고 말이다. 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역이다 – 화목케 하는 사역. 다시 말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사 혹은 사절단인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인 것이다. 외국에서 무언가 필요한 경우, 해당 국가의 대사관을 통해 대표 “대사”에게 연락을 취해야 한다. 하나님의 대사는 바로 우리들이다. 하나님께서 감옥의 문, 즉 자신을 향한 문을 열어 두셨다. 그리고 자신의 외아들을 주심으로서 세상과 화목하셨다. 그러므로 한 때 눈이 먼 죄수들이었던 우리가 지금도 여전히 눈이 먼 죄수들에게 손을 뻗어 하나님을 향한 문이 열려있음을 알려주어야만 한다.
복음 선포의 의무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3장 5-6절 말씀을 통하여 보다 더 확실히 알아볼 수 있다.
고린도전서 3:5-6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하나님께도 주어진 책임과 의무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구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인 “자라나게 하는” 의무이다. 자라나기에 앞서 누군가가 씨앗을 뿌리고, 누군가가 물을 주어야 하지만, 여기서 이 “누군가”란 결코 하나님이 아닌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이 “누군가”는 화목케 하는 사역을 책임질 사역자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역자란 성직자 또는 목사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씨앗을 뿌리시고, 물을 주시고, 이를 자라나게 하셨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이 과정에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 하나님이 계시다. 그 분과 화해하라"라는 복음을 선포하며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나주시고 그들을 당신 가까이 이끌게 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아볼로와 같이 사람들과 하나님의 말씀 속 진실을 나눔으로써 사람들의 마음 속에 심어진 씨앗에 물을 주는 이들도 있다. 굵은 글씨로 쓰여진 "너희로 하여금"이라는 부분을 주의 깊게 보라. 이는 사람들이 바울과 아볼로를 통해 믿는 자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둘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중간 사람, 화목케 하는 사역자이자 그리스도의 사절단, 곧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는 자의 역할을 잘 소화해 내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여기 하나님이 계시다"라고 선포하였는데 하나님께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신다면, 듣는 이는 과연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그분을 만나고 싶은 바람이 크다 하더라도 결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시고 자신의 역할을 다 하신다. 그러므로, 요한이 말했듯 하나님께서 이끄시지 않으면 결코 아무도 그 분께 갈 수 없다. 만약 하나님께서 모습을 드러내시지 고, 자라나게 하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아무리 많은 씨앗을 심고 많은 물을 준다 하더라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아무런 결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모습을 드러내시고, 자라나게 하신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 즉 씨앗을 심고, 물을 주어 화목케 하는 사역자의 역할을 해 낼 것이냐하는 것이다(마가복음 16:15). 이들은 하나님의 역할이 아닌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책임인 것이다.
결론
형제들이여,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일부의 사람들만을 구원 받을 자로 선정하시고, 나머지는 구원 받지 못할 자로 예정해 두셨다는 교리는 매우 잘못된 교리이다.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이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선택 받은 자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누군가가 진정 구원을 받게 될지는 각자의 믿음에 달려있다. 믿는다면 구원을 받을 것이고, 믿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으셨다. 누군가 자신의 마음 속으로 하나님을 초청하고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습을 드러내시고 그를 가까이로 이끄신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야기 하신 “아버지의 이끄심”인 것이다. 하나님을 접해본 사람은 누구나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저 상황에 따라 대충 모습을 드러내시지 않는다. 이는 그 분의 말씀을 토대로 약속된 하나님의 확고한 의무와도 같다. 하나님을 구하는 자는 누구든 그 분을 찾을 것이라고 성경에 쓰여 있다.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100%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내신다.
이제 우리의 역할에 대해 요약해보자. 뿌려진 씨앗을 자라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지만, 그 전에 오는 씨앗을 심고 물을 주는 역할인 “화목케 하는 사역”은 우리에게 맡기셨다. 이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알리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오직 일부 사람들만을 구원 받을 자들로 선택하셨다는 교리는 결국 하나님께서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지옥에 가야만 할 운명을 주셨음을 의미하며, 이는 참으로 잘못된 교리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들은 어떻게든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은 사람들을 나태하게 만든다. 운명예정설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형제자매들이여,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을 널리 퍼뜨릴 수 있는 기회를 찾는 위무는 우리가 할 일이다. 복음을 전하라. 죄수들에게 “감옥에서 벗어나라”고 일러주어라. 그들이 진정 감옥에서 걸어 나올지는 그들에게 달려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하나님을 알려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온맘 다해 그들의 구원을 원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큰 댓가를 치르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위해서도 댓가를 치르셨고, 두 팔을 활짝 벌려 우리를 기다리고 반겨주신 것과 같이, 그들 또한 기다리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