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진리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니” (PDF) PDF 버전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니”

나는 갈라디아서 3:23-4:7의 내용을 매우 좋아한다. 23-24절에서 바울은 율법의 역할이 무엇인지 설명한다. 율법은 믿음이 생기기 전 시간 동안 선생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믿음이 생기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이야기 한다.

갈라디아서 3:25-26
“믿음이 온 후로는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 기름부음을 받으신 자, 메시아임을 믿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그분의 아들, 딸들이 된다! 복음서는 복음을 의미하며, 복음은 좋은 소식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 있는 관원에게 이렇게 말했다(사도행전 16:31). 그리고 여기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라는 말씀이 있다. 갈라디아서 4장을 읽어보자.

갈라디아서 4:1-7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 종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6절과 7절에서 다시 한번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 그의 자녀들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1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 이 구절을 여러 번 읽었지만 항상 많은 위안을 준다. 그러나 여기에 혼란스러운 부분이 있다. 그것은 5절에 나오는 “아들의 명분을 얻게함(입양)”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알듯, 자녀를 입양하는 것은 입양한 부모와 출생에는 연관이 없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 얼마나 좋은지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태어날 때부터 키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태생이기 때문에 자녀가 되는 아이가 따로 있다는 뜻이 입양된 자녀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을 여러분과 나누면서 하나님 말씀에서 그 분의 자녀가 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에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가?

자녀가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태어날 때부터인가 아니면 입양에 의해 명분을 얻는 것인가?

이 글을 마치기 전까지 하나님 말씀이라는 검증된 자료만을 가지고 위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입양이라는 단어

위에서 사용된 “아들의 명분을 얻게함(입양)”이라는 구절은 그리스어 “υιοθεσία” (uiothesia)를 번역한 것이다. 이 단어는 아들이라는 의미의 단어 “uios”와 지위라는 의미의 단어 “thesis”가 합쳐진 말이다. 따라서 “Uiothesia”는 “아들의 지위를 얻음”이라는 의미이다. 갈라디아서 4장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전후 맥락을 살펴보자. 갈라디아서 3:23-4:4에서 초등교사 아래 있는 어린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린이들은 유업을 이을 자들이지만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는 종의 지위에 있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4:1-3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과 다름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그리스어: “nepioi”, 말을 잘 못 하는 유아보다 조금 더 자란 어린이로, “uioi”와는 다른 의미를 갈라디아서에서 “아들들”로 번역했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그리스어: 종 됨] 하였더니”

갈라디아서 4:1-2는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는 유업을 이을 자의 예를 보여준다. 이 단계에 있는 동안은 아버지가 정한 기간이 오기 전이기 때문에, 아들은 종의 지위에 있다. 갈라디아서 4:3에서 말하기를 “이와 같이” 우리도 아버지가 정한 때가 오기 전에는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서 종 노릇을 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4-5절은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지는 말해준다.

갈라디아서 4:4-5
“(그러나)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uiothesia, 아들의 지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4절에 맨 처음 나오는 “그러나” 라는 단어는 뒤에 나올 내용이 앞의 내용과 반대임을 의미한다. 앞의 정황은 무엇이었을까? 아버지가 정한 때가 오지 않았고, 우리는 종의 지위에 있으며, 세상적 요소의 종의 상태이며 초등교사, 후견인, 청지기 아래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러나" 라는 단어는 이제 상황이 바뀌었음을 말해준다. 무엇이 바뀌었을까? 때가 차고, 아버지가 정한 때가 왔다! 하나님께서 그 분의 아들을 보내사 율법 아래 있던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종의 지위에서 아들의 지위로 바뀌게 해 주신 것이다. 우리는 갈라디아서 3:23-26 말씀에서도 같은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갈라디아서 3:23-26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믿음이 오기 전” 시간이 있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 율법의 시간이요, 초등교사 아래의 시간이요, 후견인과 청지기의 시간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종의 지위에 있던 시간이다. 그러나 믿음이 오면, 시간이 다 찬 것이다. 그리스도가 오셨다. 초등교사, 후견인, 청지기, 율법은 사라진다. 우리는 더 이상 이런 것들 아래 있지 않고 종의 지위에 있지 않다. 대신 우리는 아들의 지위를 갖게 된다.

다시 말해, 갈라디아서 4장에서 사용했고 “아들로 입양”이라고 번역했던 “uiothesia”는 “아들의 지위”라는 말이 더 적합할 것이다. 이 말은 번역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양아버지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고 믿음이 옴으로써 우리의 지위가 바뀌어 종의 지위에서 아들의 지위가 되었다는 뜻이다. 즉, 이 말은 입양에 관한 구절에서 느껴지는 바와 같이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지위와 종의 지위를 비교하기 위해 쓰인 것이다.

입양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태어남

갈라디아서의 위 구절의 사실과 “uiothesia”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양아버지라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께 입양된 것이 아니라 자녀가 되었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주는 다른 성경 구절을 통해 입증할 수 있다. 요한복음 1:12을 읽어보자.

요한복음 1:12
“[주 예수 그리스도]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여기에서 “자녀”라는 단어는 “태어난” (from τίκτω, 출산하다)2의 그리스어τέκνα (tekna)이다. 이것은 “출산이라는 사실에 중요성을 둠3”이라는 말이다. 그 다음 구절을 보면 이러한 사실이 더 명백해진다. 위 구절을 다음 구절과 함께 읽어보자.

요한복음 1:12-13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에게서 태어난 것인가? 13절에 답이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기 때문에 입양으로 그 분과 관계된 자녀들이 아니다!

요한복음 3:3-8은 하나님께로 난 것이지 입양으로 관계된 사이가 아니며, 그 분이 우리의 진정한 아버지라는 것을 보여준다. 거기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니고데모(고대 유대의 의회 의원이자 그리스도의 숨은 제자)에게 말씀하는 두 번째 탄생에 대해 알 수 있다.

요한복음 3:3-8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그러나 그리스어로는 “위로부터 나다”라고 쓰여 있다]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그리스어: “위로부터 나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예수님께서는 두 번 태어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명백히 밝히신다. 첫 번째 탄생은 물이나 육의 탄생이다. 이것은 육체적 탄생이며 이 땅에 사는 사람 모두가 이렇게 태어났다. 그러나 이 탄생 말고 하나가 더 있는데 그것이 예수님께서 밝히신 하나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탄생이다. 이것이 “위로부터의 탄생”이다. 많은 번역가들이 이것을 “다시 태어난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이것은 두 번째 탄생이고 그렇기 때문에 다시 태어난다고 말하는 것이지만4, 그리스어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게서 태어난다”는 또 다른 표현인 “위로부터 태어난다”이다.

전에 요한복음에서 이 말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쓰여진 것을 읽었다. 여기에서는 주님께서 “위로부터 태어났다”고 말씀하신다. 둘 다 같은 의미이지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두 번째 탄생이 필수라는 사실을 강조하시는 것이다. 이는 요한복음 3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의 탄생이나 위로부터의 탄생, 영으로부터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은 입양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님을 다시 확인하자. 예수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 입양되었다거나 그래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주고 하나님을 우리의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권세를 주는 탄생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가 입양이 되었더라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입양이 아닌 탄생에 의해 그렇게 됨을 나타낸다. 계속해서 요한의 첫 번쨰 서신을 읽어보자.

요한1서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갈라디아서와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내용을 읽었다. 여기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다. 누구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과 기름 부으심을 받은 메시아이심 믿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것은 단순하지만 매우 좋은 일이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며 이것이 진정 좋은 소식이다!

계속해서 이사실, 새로운 탄생에 대한 사실을 베드로전서 1:23을 통해 확인하자.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여기에서 베드로는 요한이 말한 다시 거듭남, 두 번째 탄생, 하나님에게서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며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

베드로전서 1:23와 비슷한 내용은 요한1서 3:1-2에도 나온다.

요한1서 3:1-2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다. 내일도 아니고, 우리가 죽을 때도 아니고, 지금!!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아임을 믿음으로써. 이것은 미래에 대한 약속이 아니다. 현재의 이야기이며 여러분들에게 지금 가능한 이야기이다. 바울이 고린도 후서6:2에서 하는 말을 읽어보자.

고린도후서 6:2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은혜를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양자될 것을 기다림” – 로마서 8:23

요한1서에서 말한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로마서 8:23을 읽어보자.

로마서 8: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uiothesia– 아들의 지위]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갈라디아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는 아들의 지위를 얻었고 요한은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했는데, 위 구절을 읽으면 우리가 아직 아들의 지위를 기다리는 것처럼 들린다. 이러한 혼돈을 막는 중요한 말은 “uiothesia”이다. 누군가 이 말을 입양으로 이해한다면, 영어로 번역을 하면서 혼돈스럽게 번역했기 때문이다. 입양은 출생처럼 시간이 분명하다. 우리가 처음 태어나는 특정 날짜와 시간(보통 우리의 출생증명서에 나온다)가 있고, 두 번째로 태어나는 날짜와 시간이 있다(이것은 여러분이 자신의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셨다는 것을 믿는 날과 시간이 된다). 비슷하게 누군가가 입양되는 날짜와 시간도 분명히 있다(이것은 양부모가 관련 서류에 서명하는 날짜와 시간이다). 따라서 우리가 “uiothesia”을 입양으로 번역하면, 로마서 8장처럼 아직 때가 이르지 않은 것 같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입양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을 기다리는 상태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는 인위적인 것이며 “uiothesia”를 입양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맞는 번역은 “아들의 지위를 갖는 것”이며 여기에서 그 의미를 이해하려면 18절부터 읽어보아야 한다.

로마서 8:18-25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아들의 지위]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피조물에 대해 바울은 헛되다고 말한다. 그것은 썩어질 것이다. 그것은 탄생의 아픔으로 탄식하며 고통을 겪는다고 말한다. 이는 크나큰 고통이다! 또한 우리는 자신 안에서 탄식하며 더 나은 몸의 속량을 기다리는데, 주님께서 돌아오셔서 노쇠한 인간을 그 자신처럼 불멸의 썩지 않는 몸으로 변화시켜주실 때까지 기다린다. 우리는 직접 대면할 그 순간을 기다리며 신음한다. 바울은 말한다.

고린도전서 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위 구절에는 “지금”과 ”그 때”가 있다.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 같지만 그 때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본다! 지금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우리도 온전히 알게 된다! 지금 피조물은 신음하고 우리도 그 안에서 신음하지만 그 때는 이 썩어질 몸에서 해방될 것이다! 지금은 때가 올 것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가지고 있지만 그 때 우리는 풍성함을 가질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 전능하신 분의 자녀, 예수께서 히브리서 2:11-12에서 부르시듯, 그분의 형제지만, 이것이 지위의 전부가 아니다. 아들로서의 지위를 모두 갖게 되면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며 주께서 아신 것 같이 온전히 알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지위를 가졌지만, 이 외에 더 많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성령의 첫 열매를 가졌지만, 첫 열매일 뿐이며 더 많은 것을 기다리고 있다. 언제?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 창조물은 썩어질 것에서 해방되고 우리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본다! 그리스도와 중매(고린도후서 11:2)를 할 때 혼인(요한계시록 19)이 된다.

이 글은 로마서 8:14-17로 마감할 것이다.

로마서 8:12-17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uiothesia [아들의 지위]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을 받는다. 이 성령과 함께 하고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함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보여진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사는 방식으로 보여진다.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성령이 이끄는 대로 사는 사람들이다. 여기에 신약을 통해 나타나는 신앙과 신앙의 실천 간에 내재하는 연관성이 있다. 진정한 신앙은 항상 실천으로 나타나고 베푸는 열매로 나타난다. 야고보서에 이 내용이 명백히 나온다.

야고보서 2:17-18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우리는 한 일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 구원받는다. 그러나 이 믿음이 진실하다면 항상 하나님과 그 말씀에 순종하여 이에 상응하는 행동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중요한 말은 실천이다(예, 우리가 습관적으로 우선적으로 하는 것). 지키고 실천하지 않는(습관적에 따라 살면서) 진정한 신자, 하나님의 진정한 아들이란 없다. 여기에서 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사는 사람,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할 수 있게 사는 사람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갈라디아서 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타소스 키울라초글루

(Tassos Kioulachoglou)

 



각주

1. 바인의 사전에는 이렇게 나온다. “아바는 아람 말이다… 이 말은 어린 아기의 입술을 본떠 만든 말로 무조건적인 믿음을 상징한다. [다시 말해] “아버지”는 관계에 대한 현명한 이해를 표현한다(바인의 사전, 11쪽). 다른 자료에서는, “라비 말처럼, “어린 아이”는 ’abbā’ (아빠)와 ’immā’ (엄마)라고 말하는 것을 배운다”.” 아바는 아빠를 의미한다. 아빠는 보통 이세상에서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아빠와 아버지 모두 같은 의미이지만, 아바는 좀 더 친근한 단어이다. 아이가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꼭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아바, 파파, 대디 등 아빠라고 부르라고 하신다. 이 자체로서 하나님께서 그 분의 자녀와 얼마나 개인적이고, 친근하고 현실적인 관계가 되고자 하시는지 알 수 있다.

2. E.W. Bullinger, A critical Lexicon and concordance to the English and Greek New Testament, Zondervan Publishing House, p. 148.

3. Vine’s Expository dictionary, p. 189.

4. 사실, 이 말은 뒤에 베드로전서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용어로 사용된다.